'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처럼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

나 ... 아마 자라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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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쥐는
느낌
무게
그 생김은
참 맘에 드는데

PT에 든 맥주처럼
많았으면

작은 우물이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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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프로그래밍하고 있었잖아
의도적이든 아니든 최초 망각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신이 살아가야 한다는 걸 합리화하는
그래,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고 있었어
아무리 둘러봐도 크게 보이지 않는 가닥가닥을 찾아 엮고 있었어
그렇게 살아 남았나봐 ... 나 ...

유쾌하고 자신만만한 떠버리로,다소곳하고 차분한 컴퓨터 아저씨로, 혹 지독한 주정뱅이 푼수로 누군가 기억하든 그건 이미 나를 떠난 모습이겠지
새하얀 백지에 따박따박 내 모습을 써내려가듯, 어떤 이의 마음에, 기억에 쓰여진 나를 지울 순 없어
내 안에 쓰여진 누군가를 지우는 나처럼, 그건 이미 나를 써내린 사람의 몫이거든

'너 변했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 '

사람은, 아니 모든 사물은 변해
변한다고 알고 있잖아,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늘 익숙했던 많은 것을 잊고 사는 나를 볼 때
어 ? 내가 이랬었나 ? 하고 놀랄 만큼 낯선 나를 만날 때
세월이란 것에 많이 친해진 나를 느낄 때
잊고 잃어버리는 재주에 감탄할 따름이야

ps. 압축된 말로 건너뛰며 말하기, 혼자 말하기 같은 '아일랜드'놀이는 어떨까 ?
그건 능력이 안돼 ㅋㅋ 무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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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에 입력된 이름을 바꾸었다 ~
다행히 울 친구들은 성이 다 다르다는 게 신기하다 ^^
그 흔하다는 김,이,박두 구분되게 한 명씩 ~
아~ '이'는 두 명이군

'오'는 절대체력 !!!

'한'은 새쟁이 !!!

'이'는 석원아범

'김'은 서윤아범

'황'은 0505

'고'는 청산유수 !!!

뭐 이정도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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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그냥저냥 주절대는 글이나 성심성의껏 진을 빼내두 마찬가지일게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제목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내가 알기로는 작가라고 이름 붙은 이들중에도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하고 싶은지 모르는 인간은 넘쳐난다.

그 부담스러운 제목이라는 것에 '삶 || 죽음'이라는 거창한 말을 떡하니 써놓은 것은, 입력폼에 '제목'이라는 빈 칸이 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의미가 있을 턱이 없다. 꼬물락꼬물락대는 중인데 뭘 ^^

종교적인 생각을 배제하고 '죽음'에 대한 첫기억을 떠올리면,생라면과 연관되어있다. 우리 또래가 어렸을 때, 그 무렵 꼬마들중 생라면을 싫어하는 놈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무슨무슨 분식바람이 불어서 저녁 한 때 라면을 끓여 먹자는 운동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끓여먹든 부숴먹든 라면은 꼬마들에게 즐거운 먹거리였다.
어린 웅~은 엄마의 소중한 저녁먹거리를 슬쩍 앱쳐-_-? 작업에 들어간다. 일단 힘이 딸리니 팔꿈치루 부수었겠지, 지금은 살짝 쥐어두 부숴진다. 봉투 위쪽만 뜯어야 돼~ 편하게 앉아 먹기에는 빨빨 거리구 다닐 곳이 많아~ 잘근잘근 한 입에 먹기 좋을 만큼 으깬다음 스프를 살살 뿌려 흔든 후 봉투를 옆에 차고 마실 나간다. 오~ 저 녀석두 한 봉다리 차구 나왔군 ... 우리 조용한 데 가서 으찌니쌈이나 하자 ~
뭐 이런 스토리인데 일단 문제는 컴백홈후 발생한다.
요새처럼 넉넉치 않으니 가족들 찬 밥 말아 저녁 먹을 만큼만 봉지수 맞춰 사오는 것이 큰 문제다. 똘망똘망한 아들놈이 먹고 살겠다고 저러는 걸 심하게 나무랄 수는 없고 조 놈 버르장머리는 고쳐야겠고 ...

엄마 : (그냥 지나치는 투로,하지만 큰 소리로) 뉴스에서 봤는데 라면 삶지 않고 그냥 부숴먹으면 스프가 독해서 죽게된데~

아빠 : (알았다는 투로,역시 큰 소리로) 그~으~래 ~~ ?

이거 큰일났다. 나 죽게 생겼다. 어린 웅~은 담요를 싸고 웅크린 채 심한 오한에 떨구 있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 이렇게 생각하는 거 ... 내가 없어지는 건가 ? 이리저리 생각할 수 있는 이 머리통이, 내가 영영없어지는 건가 ? 아주 영원히 ? 다시 돌아오지도 않고 ?
무지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저 자구나면 죽어요. 잘 계시구요 ... 이런 식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며 마음속으로 인사를 마쳤다. 어린 웅~은, 9시 어린이는 잠자리에 들어야 착하다는 방송까지 무사히 들은 후 죽을 채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노인들께 전형적으로 보이는 불안증상,우울증이십니다. 그걸루 인해서 전체적인 근육통이 오셨구요'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종교적인 믿음을 떠난 생명체의 근원적인 공포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말이죠. 한평생 저리 강건하게 사신 분이, 아직도 저렇게 명확하신 분은 드물겠다 여겨지는 분을 바라보며, 사람 살고 죽는 것에 대해 하나씩 더 느끼고 배우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전혀 이면적인 것이 아닌 같은 선상의 다른 모습일진데,죽음을 당당히 맞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

'태어나기 전이 두려운가? 죽음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죽음은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새로운 길이다. 이런 새로운 모험에 들어 갈텐데 어찌 신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살아서 죽은 상태, 죽어서 살은 상태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준비된 사람들만의 길인가 ?

단 한 번만 주어진 이 삶이라면 계속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인가 ?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흙으로, 나무로,하늘로, 그 하나하나의 알갱이로 진화하여 ... 풍요로워지는 '나'는 과연 '나'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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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죽음

- 아래는 개인적인 필요로 '롤랑 바르트 전집 12, 김희영 편역'중에서 타이핑한 것입니다. 문제가 된다면 삭제합니다.

- 이 글은 1968 년 '망테이아'지에 발표된 것으로 '언어의 살랑거림'에 재수록되었다.

발자크는 그의 중편소설 '사라진느'에서 여자로 가장한 한 거세된 자에 대해 말하며, 이런 문장을 쓰고 있다. '그녀의 갑작스런 두려움, 그녀의 이유 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 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1)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 그것은 여자 아래 감추어진 그 거세된 자를 모르는 척하고자 하는 소설의 주인공인가 ? 아니면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의해 여성에 대한 한 철학을 가지게 된 개인 발자크인가 ? 또는 여성성에 대한 "문학적" 관념을 언명하는 저자 발자크인가 ? 보편적 지혜인가 ? 낭만적 심리학인가 ?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2)이다.

아마도 그것은 항상 그래왔던 것 같다. 하나의 사실이 현실에 직접 작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동사적인 목적으로 이야기되기만 하면, 다시 말해 상징을 실천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기능도 가지지 아니하면, 그때 이런 분리가 나타난다. 목소리는 그 기원을 상실하고, 저자는 그 자신의 죽음으로 들어가며, 글쓰기가 시작된다. 그렇지만 이런 현상에 대한 감정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민속학적인 사회에서의 이야기는 어떤 인간이 아닌, 엄밀히 말해 우리가 결코 그 '천재성'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그 '언어 수행'(즉 서술적 약호의 지배)을 찬미하는 매개자, 샤먼, 낭송자에 의해 담당되어 왔다. 저자란 중세를 벗어나자마자 영국의 경험주의와 프랑스의 합리주의, 종교 개혁의 개인적인 신앙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개인의 명성을, 좀더 고상하게 말한다면 '인격'이라는 것을 발견한 후에 생산된 현대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문학 안에서 저자의 '인간'에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한 것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요약이자 귀결인 실증주의라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저자는 아직도 문학사의 교과서나 작가의 전기, 잡지의 대담, 그리고 자신의 내적 일기에 의해 그들의 인간과 작품을 연결시키려는 문학가들의 의식 속에서도 여전히 지배적이다. 일반적인 문화 안에서 발견되는 문학의 이미지는 가차없이 저자, 그인간, 생애, 취향, 정념에 집중되어 있다. 비평 또한 대부분의 경우, 보들레르의 작품은 인간 보들레르의 실패이며, 고흐의 작품은 곧 그의 광기이며,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은 그의 악덕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품을 만들어내 사람 쪽에서 모색되어 왔다. 마치 다소간에 투명한 허구의 알레고리를 통하여 거기에는 결국 언제나 하나의 유일하고도 동일한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속내 이야기'를 털어 놓는 저자가 존재한다는 것처럼.

비록 저자의 제국이 아직도 무척 강력하기는 하지만 (신비평은 자주 그 제국을 공고히 했을 뿐이다), 벌써 오래 전부터 몇몇 작가들이 그것을 붕괴하려고 시도해 온 것은 자명하다. 프랑스에서는 아마도 말라르메가 그 첫번째일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언어의 소유주라고 여겨져 왔던 자를 언어 자체로 대체할 필요성을 광범위하게 인식하고 예견했다. 그에게서 또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저자가 아니다. 쓴다는 것은 선행적인 몰개성 -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그 거세적인 객관성3)과는 결코 혼동될 수 없는-을 통하여 '자아'가 아닌, 오직 언어만이 작업하고 '수행하는'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라르메의 모든 시학은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데에 있었다(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독자의 자리를 회복시키고자 함이다). 발레리는 자아의 심리학으로 인해 조금은 혼란한 상태에서 말라르메의 이론을 약화시키기는 하였지만, 그의 고전주의적 취향에 의해 수사학의 가르침을 준수하면서도 계속해서 저자를 의문시하고 조롱하였고, 자신의 활동의 언어학적이고도 '모험적인' 성격을 강조하였으며, 전 산문 저술을 통하여 문학의 본질적인 언술적 조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 조건 앞에서 작가의 내재성에 대한 모든 의뢰는 순전히 미신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프루스트 자신도 그의 분석이라 불리는 것의 외간상 심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작중인물의 관계를 지극히 정교한 수법으로 가차없이 뒤섞어 놓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화자를 보고 느끼고 쓰는 자가 아니라, 이제 글을 쓰려고 하는자로 만들었다(소설의 그 젊은이, 그런데 사실 그는 몇 살일까 ? 누구일까 ?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글을 쓸 수 없는 그. 그리고 소설은 드디어 글쓰기가 가능해질 때 끝이 난다). 프루스트는 현대적인 글쓰기에 그 서사시를 부여했다. 근본적인 뒤집음에 의해 그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처럼 그의 삶을 소설 속에 투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그가 쓰는 책이 그 작품의 모델이 되는 그러한 작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샤를뤼가 몽테스키외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화적이고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의 몽테스키외가 샤를뤼에서 파생된 2차적인 단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4) 그리고 현대성의 선사시대라 할 수 있는 초현실주의에 국한시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분명 언어에 최상의 자리를 부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언어는 체계이나 이 운동이 목표로 하는 것은 낭만적이게도 - 게다가 환상적인, 왜냐하면 약호는 파괴될 수 없으며, 단지 '유희하는' 것만이 가능하므로 - 약호의 직접적인 전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현실주의는 기대하던 의미를 갑작스레 좌절시킬 것을 권유하면서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저 유명한 '돌발 비약'이다), 머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손에게 되도록 빨리 쓰게 하는 임무를 맡김으로써(이것이 자동기술이다), 또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글쓰기의 체험과 원칙을 인정함으로써 저자의 이미지를 탈신성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 밖에서도(사실 이런 구별은 이제 낡은 것이다), 언어학이 언술 행위 전체가 대회자들이라는 인간에 의해 채워지지 않고서도 완벽하게 기능하는 하나의 텅 빈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 주면서 저자의 파괴에 귀중한 분석 도구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인간'이 아니 '주어'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말하는 데에',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

저자의 멀어짐은(브레히트와 더불어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거리두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문학적 무대 저 끝에 있는 단역 배우처럼 축소된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 혹은 글쓰기의 행위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인 글쓰기를 완전히 변모시킨다(혹은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텍스트는 그 속에서, 그 모든 층위에서 저자가 부재하도록 만들어지고 읽혀진다). 우선 시간도 더 이상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저자의 존재를 믿는 한 저자는 항상 그의 책의 과거로 간주되어 왔다. 책과 저자는 '전'과 '후'로 배열된 채 동일 선상에 위치한다. 저자는 책을 부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책 이전에 존재하고, 책을 위해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그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자신의 작품과 선행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와 반대로 현대적인 필사자5)는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선행하거나 초과하는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든 갖고 있지 아니하며, 자신의 책이 술어가 되는 그런 책의 주어가 아니다. 거기에는 단지 언술행위의 시간만이 존재하며,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진다. 사실인즉(혹은 그 결과), 쓴다는 것은 더 이상 기록, 확인, 재현, 묘사(고전주의자들이 말하는)의 조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옥스퍼드 철학의 영향을 받은 언어학자들이 수행동사6)라고 부르는 것,정확히 말해 언술행위가 발화하는 행위 외에 어떤 내용(어떤 언표)도 가지지 아니하는, 그런 진귀한 언술적인 형태를 가르킨다.(전적으로 1인칭과 현재 시제로 주어지는). 그것은 뭔가 왕들의 '짐은 선언하노니', 혹은 고대 시인의 '나는 노래한다'와도 같다. 이렇게 저자를 매장하고 난 현대의 필사자는, 선배들의 비장한 관점에 따라 손이 사상이나 정념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느리며, 그 결과 필요의 법칙을 만들어 이 느림을 강조하고, 또 자신의 형식을 무한히 '가다듬어야' 한다고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반대로 그에게서 손은 모든 목소리로부터 차단된 채 단순한 기재의 몸짓에 이끌려 기원이 없는 장을 그려 나간다. 또는 적어도 언어라는 기원 외에는, 다시 말해 모든 기원을 끊임없이 문제시하는 언어 외에는 다른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아니한다.

1)여기에 나오는 일련의 수식어들은 전부 여성명사들로서, 그것을 한정하는 소유형용사 또한 여성이다. 따라서 이 소유형용사는 단순히 '그' 혹은 '그것의'로 풀이될 수 있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런 여성 소유형용사의 사용은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녀의'로 옮기고자 한다.
->읽던 자리로

2)여기서 바르트는 명암, 흑백 등이 피사체와는 반대가 되는 음화의 이미지를 통하여, 글쓰기 주체 안에서의 주체의 부재와 그 전복적인 양상을 말하고 있다.
->읽던 자리로

3)여기서 거세적이라고 옮긴 프랑스어의 castratrice는, 거세라는 1차적 의미에서 더 확대되어 신체의 다른 부위를 절단하거나 훼손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거세적인 객관성'이란 모든 반응이나 다양한 해석을 차단시키는 불구의, 풍요롭지 않은 그런 직접적인 객관성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읽던 자리로

4)샤를뤼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동성연애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당시 시인이자 귀족이며 그 오만함으로 사교계에서 명성이 드높았던 몽테스키외라는 실제 인물에서 차용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읽던 자리로

5)전기적이고 심리적인 주체로서의 저자의 개념은, 바르트의 후기 문학 실천에 이르면 필사자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저자의 개념이 무엇보다도 실증주의적이고도 합리주의적인 정신에 의거한 것이라면, 필사자는 그 자신의 텍스트를 결코 초월할 수 없는 언술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소모하는 자이다. 원래 프랑스어의 scripteur(라틴어 scriptor)라는 말은 작가, 저자의 동의어로, '글을 쓰다'를 의미하는 scribe(라틴어 scriba)와 구별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어원의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다 수용하여, 작가란 심리적인 주체가 아닌 선행하는 글쓰기를 베끼며 변형하는 자라는 점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필사자로 옮기고자한다. 또 쓰기를 실천하는 자로서의 필사자는 말하는 자, 즉 화자(locuteur)와 대립된다.
->읽던 자리로

6)수행동사는 명령하다, 선언하다, 약속하다라는 동사처럼 말하는 동시에 하나의 행동을 수행하는 동사를 가리킨다. 수행동사 혹은 언어 수행이라고 불리는 이 언어학 용어는 언어능력에 대립되는 것으로, '구체적인 언어의 실제적인 사용을 의미한다.(...)언어 능력은 추상적이고도 이상적인 것이지만,(...)언어 수행은 구체적이며, 기억의 한계, 고쳐 말하는 것, 부주의 등 언어 이외의 요소에서 오는 불완전한 형식까지도 포함한다.(이정민, 배영남 '언어학 사전', 한신문화사, 1982, 557쪽)
->읽던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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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애초에 인터넷을 인터넷 뱅킹이라던가 메일밖에는 사용할 일이
없는 인간이라 ... 그나마 하나있던 홈피마저 그 계정을 맡은 디쟈너가
지워버려서 더더욱 사용할 일은 드물어졌다.(다행히 DB는 남아서 안심^^)

뭐 밥 벌어먹기로 코딩질을 하거나 그럴 때두 약간은 ...

무슨무슨 검색 사이트에 지식검색으로 대부분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사람이 주위에 넘쳐날 때,
싸이질루 하루종일 보내며 답글 날리구 서로서로 엮어 나가는 걸 볼 때,
그냥 다른 사람들은 인터넷이랑 저렇게 지내는구나 하믄서 점점 둔해지는
날 보게 된다. 점점 둔해지나보다.

친구사이트를 들어가보았더니 공개블로그 소스를 사용하여 디쟌한 것이
보기에 참 좋아 그 디쟌을 고대루 받아 올려보았다.
타이틀이미지 파일을 바꾸구, 백그라운드 이미지만 맹글어서 붙히면
되겠구나 하믄서 약간의 궁리중이지만 내가 해봐야 우스워지것지 ^^

암튼 꼼지락꿈지럭 댈 공간이 웹상에 하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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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오랜 공백의 적응기간이라 한 주간 20~30분 사이의 유산소운동 후
슈퍼세트를 가벼운 중량으로 돌기루 했다
슈퍼세트는 일정부위에 상관없이 이것저것 휴식시간 없이 쭉 돌아서
한 세트를 마무리 짓는 걸 말한다.
운동을 한 동안 하지 않았거나 주 2 ~ 3회의 운동시간을 갖는 사람에게 적절하다.
이번 주를 이걸루 마무리하구 담 주부터는 한 달여간은 요런 계획이다.

나는 연관된 동작을 선호하는데 이를테면 등과 이두를 같은 날루 잡는 것과 같이
등운동을 하면서 저절루 웜 업되는 이두를 등운동이 끝난 후 마무리 운동을 하는 것 ...
그딴 걸 말한다.

월 : 유산소 20~30분
가슴(플랫,인클라인 벤치류 2종 3세트 반복수 8~12회, 케이블 크로스 오버 4세트 8~12회, 딥 8~12회)
삼두(트라이셉 프레스다운 3세트 8~12회, 원암 오버헤드 익스텐션 3세트 8~12회)

화 : 유산소 20~30분
복부(크런치 5세트, 시티드 니업 5세트)
다리(스미스 머신 스쿼트 3세트 8~12회, 라잉 레트 컬 3세트 8~12회, 런지 3세트 8~12회)

수: 유산소 20~30분
등(덤벨 로우 3세트 8~12회, 풀 다운 3세트 8~12회)
이두(머신 컬 3세트 8~12회, 시티드 덤벨 컬 3세트 8~12회)

목: 유산소 50~60분
복부(니업류 몇 가지)

금: 유산소 20~30분
어깨(머신 or 덤벨 프레스 3세트 8~12회, 레이즈 3종 3세트 8~12회)
그날따라 그냥 땡기는 것 몇 가지 추가~

토: 유산소 50~60분
복부(니업류 몇 가지)

일: 휴식

뭐 이정도가 될 것 같으다.
유산소운동일이 한 주에 이틀을 차지하는 걸 보면 체중감량에 목표가 있다는 ^^
암튼 이리 적어놓구 보니 정리정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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