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미시마 유키오(웅진닷컴,2002.12)
책 :: 걷기 2007. 11. 12. 16:58절대미의 추구, 세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금각사'.
1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나오는 말더듬에 대한 묘사만 보고도
다른 작품은 어떤 것이 있는지, 뭐하던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이래저래 찾아보니 참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작가'라는 단어가 갖는 '평범'이라는 것에서 아예 거리가 먼)
일본이 낳은 기형적인 캐릭터, 미시마 유키오.
1925년, 일본 최고의 명문가에 태어나
귀족만 다닌다는 학습원 수석 졸업.
동경제국대 법학부 졸업. 대장성 취직.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촥촥 밟아주고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두 번이나 오른 작가.
이력만 보면 참 그럴 듯하다.
그러나 1970년 자위대 본부를 점거한 채
자위대의 총궐기와 일본의 재무장을 호소하면서
전통 무사식으로 할복자살해
일본과 전 세계에 충격을 준 극우파.
-_-
'토토로'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극우파일 수 있는지,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경우에는 그저 표면적으로 놀라웠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유년시절, 타고난 허약체질로 육체적인 열등감에 시달렸던,
명문가의 그저그런 도련님이었나 보다.
30대에 들어가면서 보디빌딩, 검도, 승마등
남성적인 어떤 것에 심취하면서
슬렁슬렁 극우파가 되어가는데 ...
('금각사'는 보디빌딩을 시작한 그 즈음에 연재된 소설)
-_-
탐미주의자라메~ 이게 뭐니~
(금자야, 너 눈화장이 그게 뭐니~)
1969년 동경대 전공투와 800 대 1의 사상적 토론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극우파 미시마와 극좌파 전공투의 만남이 이뤄진 것도 신기하지만,
(양극단의 근본주의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
미시마를 원숭이라 조롱하며 비웃던, 전공투가 점거하고 있는 동경대 강의실에
혈혈단신 정신의 칼날을 세우고 들어간 미시마도 놀랍다.
이 토론은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있는데 그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관념어의 나열이고 크게 관심이 있는 분야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정독할 필요를 못 느꼈지만,
당시 토론의 분위기와 미시마에 대해 좀더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이 냥반의 군국주의는 나름 탐미한 것인가 ...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미사마 유키오가 1925년 중국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배곯고 자랐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도 생각해본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미시마 할복에 대한 글이 있다.
이게 생방으로 전 일본에 뿌려졌다구~?!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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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가 행한 할복 자살의 방법은, 오랜 기간 일본을 지배해 왔던 무사 정권의 사상적 기반인 무사도(武士道)에서 주군의 명령에는 생명을 바쳐 절대 복종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며 무사들이 행하여 왔던 자살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미시마 유키오는 1967년(소화 42)에 자위대에 체험 입대하여 유격훈련과 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연습을 한 후에, 그에게 무조건 충성을 맹세한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다테노카이 : 방패의 모임]를 정식으로 결성했다.
1970년(소화 45)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그를 따르던 동료들인 [다테노카이]의 회원들과 함께 동경 한복판에 있는 자위대 총감부에 들어가, 총감을 꽁꽁 묶어 인질로 잡고 자위대 병사들에게, 일본 헌법 9조의 개정, 민족정신, 군인의 이상, 시대의 퇴폐 등에 대해서 호소했지만, 자위대 병사들은 무관심과 야유 그리고 놀림의 말로 그의 호소에 반응했다. 그는 일본 자위대 병사들에 대해 실망의 말을 마지막으로 외치고,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한 뒤 총감실로 돌아왔다.
총감실로 돌아온 미시마 유키오는 상의의 단추를 풀어 상반신이 벌거숭이가 된 채 무릎을 꿇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연습한 대로 정좌를 앉았다. 그리고 단도를 쥐어 그 칼을 왼쪽 옆구리에 대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천황 폐하 만세]를 세 번 의식적으로 외치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얏" 하는 큰소리와 함께 단도로 왼쪽 배를 푹 찔렀다. 단도를 쥔 양손으로 배꼽 밑을 밀며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칼을 밀어 나갔다. 모든 것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배를 절개해 나가는 순간, 미시마 유키오의 목을 자르기 위해 일본도를 번쩍 쳐들고 있던 모리타가 칼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첫 번째 내려친 칼날은 모리타의 손의 떨림에 의해, 아직 살아 숨쉬며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터져 고통스러워하는 미시마 유키오의 어깨에 깊은 상처만 냈을 뿐이었다. 모리타가 내려친 두 번째 칼날도 아직 살아 있는 미시마 유키오의 육체에 깊은 상처만 냈을 뿐이었다. 모리타가 내려친 세 번째 칼날이 간신히 미시마 유키오의 목을 몸통에서 떼어놓았다. 미시마 유키오의 잘려진 머리와 몸통의 격렬한 떨림이 멈춘 순간, 이번에는 모리타가 상의를 벗고 정좌하고 앉았다. 피투성이의 단도를 움켜지고 그가 순식간에 배를 가르자, 고가는 한칼에 그의 목을 내려친다. 남은 사람들이 막 잘려진 두 개의 머리를 줍고, 두 개의 몸통 옆에 서서 피비린내 나는 악취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왜 배를 가르며 몸통에서 머리가 잘려 나가는 할복 자살의 방법을 택했을까? 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타가 내려친 한칼에 매끄럽게 몸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지 못했을 때의 미시마 유키오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은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공포와 놀라움을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느 평론가는 [현대 일본 작가의 직업적인 고독과 고도로 폐쇄된 개인성을, 미시마 유키오는 집단적인 현실 속에서 극복하려고 했다 ]라고, 또 다른 평론가는 [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를 달린 그의 눈에는, 동시대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일본인들의 하는 짓이 너무나 시시해 보였기 때문에, 그런 속물들과 웃고 시시덕거리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이라는 논(論)도 있지만, 미시마 유키오가 생전에 말해 왔던 [일본 사람 이외는 할복 자살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한 말이 왠지 지금도 항상 가까이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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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 http://www.yes24.com/Goods/FTGoodsView.aspx?goodsNo=334779&CategoryNumber=0010010170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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