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찾아서

책 :: 걷기 2004. 9. 16. 23:49
스콧 니어링의 생애와 사상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찾아서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추상미가 김상경에게 '어느 한 사람의 삶을 바꿔 놓았죠'하며 아는 척을 하던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 그때 김상경의 손에 들려있던 스콧 니어링 자서전을 보고 아~ 저 책, 했습니다. 웬 노인 얼굴이 있고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던 무지한 웅~은 '뭐 세상에 널린 게 위인이고 전기이고, 알지도 못하는 책 읽을 시간이 없지'하며 지나치던 것이거든요.

'삶을 바꿔 놓았다 !' 뭐 이런 말 들으면 궁금하잖아요. 대체 뭐하던 냥반이기에 책 하나로 다른 사람 삶을 지 맘대로 바꿔 ~ !!! 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가히 바꿔 놓을만 합니다. ^^ 책을 참 좋게 읽어 낼름 원서를 주문한 웅~, 요새 영어와의 전쟁을 선포했기에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아래는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스콧 니어링 자서전'중에 실린 것을 옮겼습니다. 진 헤이가 1997년에 발표한 '자유언론을 위한 개인적 희생'을 참고로 해서 소설가 김영현님이 정리한 것이라 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구입해서 읽어 보시면 좋을 듯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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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한 탄광 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꼭 1 백 년 뒤인 1983년 메인 주 하버사이드에서 페놉스콧만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는 인생의 가장 정점에 이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철저한 채식주의와 검약이 몸에 밴 그는 백 살이 되자 지상에서의 자신의 임무를 마감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었던 것이다. 그것은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죽음이었다. 그는 1백 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가장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다. 성인이 아니면서 그런 완전한 삶을 산 사람들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의 삶이 순탄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가 살았던 1백 년 동안은 여러 면에서 현대사회가 격변을 겪은 시기였다. 젊은 시절 그는 열정적인 사회개혁가였고, 자유주의자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였다. 에디슨이 새로운 발명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중년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발명품들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혁명과 전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니어링은 흥분하였으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죽어가는 수백만의 민간인과 병사들을 보고 절망을 느꼈다.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인 그는 전쟁의 광기에 대해 강한 목소리로 비판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재판정에까지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중요한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곤 했는데 그러한 문제들이 사회 전반에 널리 인식되기 위해서는 한참 시간이 흘러가야 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개인적 자유의 수호자,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문명 전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가한 사회철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실천적인 생태론자가 되었다.

일찍부터 그가 가진 관심의 영역과 통찰력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들이 많다. 예를 들자면 스콧 니어링이 1911년 '아동노동문제의 해결책'을 출간했을 때만 해도 아동노동문제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았던 1912년에 '여성과 사회진보'를 출간하여 여성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 할 때 니어링은 '거대한 광기'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전쟁 기계를 움직이는 역학관계를 상세히 묘사했으며 징집법안을 "비미국적"이며 "헌법정신과 미국의 전통에 명백히 위반되는 법안"이라고 비난했었다. 1923년 니어링이 "석유, 전쟁의 씨앗"을 발간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후 60년 지나 발발한 걸프전은 그의 통찰력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1929년 스콧 니어링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책을 많이 저술하였는데 '블랙 아메리카'는 미국내에서 흑인들이 당하는 폭력을 생생히 묘사한 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흑인을 니그로 등의 경멸적인 호칭으로 부르던 시기였으며 그러한 폭력사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삿거리로 다루어지던 때였다. 또한 1933년 니어링은 '파시즘'을 저술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파시즘을 제약없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생각했으며 세상에 대한 첫번째 경고라고 말했다.

이러한 선구자적 생각과 단호한 태도 때문에 그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굽힘이 없이 설파했던 니어링은 두 대학의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순회강연 요청도 끊겨버렸다. 국가에서도 그를 위험인물로 분류하여 1916년 법무성이 그의 원고를 압수하였는데 이때는 FBI가 창설되기도 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차세계대전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행적 때문에 스파이 활동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모든 학문적 강의는 중단되었지만 니어링은 뉴욕시에서 열린 미국 사회과학학회에서 주최한 랜드 스쿨 반전사회과학학회에 회원으로 참여했으며 '거대한 광기'를 포함해서 수편의 반전논문을 학회지에 발표하였다.

같은 때에 니어링은 시회당에 가입했는데 1918년에는 현직의원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에 맞서서 선거에도 출마하였다. 후보자는 단 두 명뿐이었는데 사회당의 높아가는 인기에 위협을 느낀 민주당과 공화당이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를 연합공천 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것이 다반사였다. 신문사들은 탄압을 받았고 사무실이 불시에 수색을 당하고 우편물이 검열되었다.국외로 추방되는 사람들도 생겼다. 뉴욕 시는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투옥하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블랙웰 섬의 교도소에 사회당 강령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뉴욕 콜'지가 풍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 유세장은 공공토론과 투쟁에 있어 가장 좋은 장소가 되었다.

후보지명 수락연설에서 니어링은 현 민주당 정부가 스파이법 등의 법률을 만들어 헌법에서 보장된 권리들을 제한하고 부정하는 것에 반대하여 의회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니어링 자신이 이미 스파이 법을 위반한 혐의로 연방법원에 기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당국이 제출한 유일한 증거는 그가 쓴 논문 '거대한 광기'하나뿐이었다. 출판사와 랜드 스쿨도 그 논문을 출간한 혐의로 함께 기소되었다.

미국노동연감(1919~20)에 의하면 한창 전쟁중이던 1917년 4월에서 1918년 11월까지 미국 내에서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와 관련하여 기소된 사람은 모두 4천 5백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천 5백 명 정도가 유죄 판결을 받아 투옥되었는데, 그 중 9백 98명이 스파이 죄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짜 간첩 중에서는 스파이 법에 의해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미국 정부는 자국 내의 수많은 급진주의자와 평화주의자들을 이 법에 의해 감옥으로 보냈던 것이다.

1918년 11월 선거에서 니어링은 1만4천5백23 대 6천 2 백 14로 가르디아에게 패했다.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스파이 혐의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1919년 2월 6일에서 2월 19일까지 열렸는데 니어링은 많은 기자들로 가득 찬 이 재판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며,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그는 모든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으며 '거대한 광기'의 모든 내용이 자기의 생각과 일치함을 인정했다. 최후진술에서 니어링은 열정에 찬 목소리로, 그리고 매우 감동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믿음과 철학에 대해 말했다.

" ...... 여러분, 나는 징병 및 등록업무를 방해하고 불복종과 불충성, 반란 및 전쟁의무이행을 거부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하지만 검찰측은 내가 징병업무를 방해했으며, 의무이행의 거부, 불복종, 반란 등의 혐의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검찰측이 증거로 제시한 논문 '거대한 광기'는 발간된 지 17 ~ 18 개월이나 되었고 그 동안 약 1만 9천 부가 배포되었지만 실제로 검찰측이 주장하는 일이 발생한 사례는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나에게 적용될 수 있는 법규는 내가 내 의견을 발표했다는 사실, 즉 내가 이 책을 쓴 것과 사회당 강령에 대한 세인트루이스 선언에서 내가 내 의견을 발표한 것에 대해 적용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나는 책을 쓰고 그 책을 출판사에 보내어 출간되게 한 죄로 기소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유죄라면 그것은 내가 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한 것이 유죄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의견 외에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

나는 민주주의가 귀족정치나 독재정치 등의 다른 정부형태보다 훨씬 뛰어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토론은 민주주의의 한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토론하여 결론에 도달하고 그 결론을 자유롭게 발표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토론을 통해서만 합리적인 공공의 의견에 도달할 수 있으며 토론이 제한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파괴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시민들에게 그들의 신념을 발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권리는 올바른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올바르지 못한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동시에 포함하는 것입니다. 헌법은 시민들이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권리만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자기가 정직하다면 잘못된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논문에서 발표한 견해는 내 자신의 의견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이 견해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나의 견해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미래가 밝혀줄 것입니다. 이 나라의 모든 시민은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법률이 허용하는 한도에서는 어떤 주제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의문에 대한 견해를 발표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개입하여 이러한 권리를 제한한다면 그 순간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의 시민이며 나의 조상들은 2백 년 이상 이 나라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미국 시민으로서 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수정헌법에서는 시민들에게 자유로운 언론과 출판의 자유, 즉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말하고,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를 위해 우리의 선조들은 유럽을 떠나 이 땅으로 온 것입니다. 이러한 권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현재도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무시된다면 이 나라의 번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우리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지금 이 나라의 풍요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지금의 미국은 자유를 원합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으로서 이 자유야말로 그것을 위해 우리가 싸워야하는 가장 소중한 자산인 것입니다. 이 자유는 법률과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것입니다. 설사 법률과 헌법이 없다 해도 이 자유는 민주사회의 일원에게 보장된 당연한 권리입니다.

나는 그 논문에서 미국의 자유, 그리고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친교를 위한 나의 희망, 나의 이상과 나의 포부를 표현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며 나머지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 "

배심원이 판결을 내리는 데는 장장 30 시간이나 걸렸다. 그 결과 '거대한 광기'를 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이 내려졌는데 그것으로 그는 당시에 이와 비슷한 전쟁 관련 혐의로 기소되어 무죄판결을 받은 유일한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출간한 랜드 스쿨은 스파이 법 위반혐의가 인정되었다. 랜드 스쿨은 미국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랜드 스쿨은 3천 달러의 벌금을 물었는데 모두 1달러짜리 지폐로 지불했다.

그후 니어링은 할 수 있는 한 글쓰기를 계속했으며 소규모 좌익그룹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연을 가졌다. 그러나 니어링은 이미 사회로부터 위험분자, 과격분자를 몰려 소외당하고 있었다. 차츰 강연 요청도 끊겼으며 신문에 기고하는 글조차 거절당했다. 그는 직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안락한 중산층의 가정을 추구했던 그의 첫번째 아내인 넬리 시즈는 더 이상 니어링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별거를 당하고 아이들로부터도 멀어졌다.

가족으로부터도 떨어진 니어링은 얼마되지 않는 연금에 의지하며 메인 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일반 사회의 시각으로 보자면 실패한 인생의 전형처럼 보여지는 생활이었다. 그때 그의 곁에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 마흔다섯 살이었던 니어링보다 스무 살이나 연하였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지금은 헬렌 니어링으로 더 잘 알려진)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그의 인생 후반부를 함께한 최고의 반려자이자 동지가 되었다.

헬렌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음악 분야에 대해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으로 그의 사상과 삶에 도취했던 헬렌은 이 보잘것없는 중년의 사내에게서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지혜를 느꼈다. 니어링과의 만남은 그녀에게도 역시 생의 일대 전환점을 이루게 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화려하고 유혹적인 문명적 생활을 포기하고 대신 니어링과 함께 버몬트 주의 숲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단풍사탕을 만들어 파는 생활을 시작했다.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하고, 가난한 생활의 시작이었다.

1945년 8월 6일 그의 62번째 생일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날 니어링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

니어링은 부인 헬렌과 함께 처음에는 버몬트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고 겨울에 농장이 얼어붙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면 여행을 떠나고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며 지냈다. 스콧과 헬렌은 그들의 시골생활을 '조화로운 삶'에 소개했다. 그들은 또한 '단풍사탕 만드는 법'을 써냈는데 이 책은 그 주제를 다룬 첫번째 책이자 아직도 유일한 책이다.

이 두 권의 책은 1950년과 1954년에 자비로 출판되었는데 베트남전쟁 와중인 1970년에 랜덤 하우스에서 재출간되었다. 이 책들의 내용은 반전운동을 하던 당시의 젊은이들의 욕구에 맞아 떨어졌고 니어링 부부는 미국의 우상이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이 부부에게는 매우 어색한 것이다.

1970, 80 년대가 되자 그의 이름은 차차 사람들 속에 알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호숫가 니어링 부부가 손수 지은 돌집과 그들의 생활을 보러 찾아오곤 했다. 그들의 눈에는 스콧 니어링이 가난하지만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명석한 몽상가로, 개인적 희생을 개의치 않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비쳐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숲에서 살게 되기까지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의 '화려한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의 생애 전반부에 행해졌던 열정적인 사회활동은 이제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스콧과 헬렌이 죽은 뒤 세워진 '굿 라이프 센터'의 간부들조차 정관을 작성하면서 그의 환경운동이나 정신적, 전원생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적 견해도 빠트리지 않고 정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할 정도였다.

말년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존경은 젊은 시절의 화려한 활동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운 추종자들이 그를 존경하게 된 것은 스콧과 그의 두번째 아내 헬렌이 숲속에서 행한 독특하고 절제된 생활방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찍이 데이빗 소로우가 월렌 호수가에서 실현했던 생활과도 유사한 방식의 삶이었다. 이들을 모범삼아 수천 명의 젊은 이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갔다.

이 젊은이들은 스콧 니어링이 걸어온 과거의 급진적인 행적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유기농장에서 감자밭을 가꾸는 이 주름지고 구부정한, 팔꿈치를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괴팍한 노인이 금세기 초 버트란트 러셀과 클레런스 데로우에 버금가는 연설과 강연으로 수천 명을 흥분시켰던 명연설가였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꾸준하고 인내심 있게 수동톱으로 산더미 같은 나뭇더미와 가지들을 16인치 크기로 잘라 부엌용 난로의 연료로 만드는 조그맣고 깐깐한 노인이 1917년 반전 논문을 발표하여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 연방법정에 피고로 섰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1983년 8월 24일,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 년의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메세지는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극대화되면 될수록, 우리의 삶이 더욱 바빠지고 황폐해질수록, 더욱 강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1911년 그가 써놓은 좌우명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 ...... 간소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은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