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 배호 ~
생각 :: 生覺_살면서 깨닫다 2002. 3. 11. 19:01이 냥반 앨범은 짝퉁가수들이 부른 것이 하두 많아서
전문가들도 어느 것이 진짜 배호 앨범인지 모른다 합니다.
배호보다 더 배호다운 창법을 구사하는 놀라운 분들이 많죠.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곡입니다.
(심금 (心琴) : 외부의 자극을 받아 움직이는 미묘한 마음)
저두 이제 나이살 먹은 축이지만 배호 세대는 아닌데 ~ ^^
(우린 이문세 세대일까 ... 우리 나이 또래한테 이문세만큼 판 많이 팔아먹은 가수는 없지 ~)
요새 어중간 유치찬란한 트롯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죠 ...
크 ~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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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살다간 천재가수
배호가 만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꼭 30년. 애수에 젖은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과 진한 호소력을 담은 그의 노래는 여성팬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의 노래들은 많은 남자들의 애창곡으로 지금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김대중 대통령도 그를 최고의 애창가수로 꼽는다. 잊혀진 많은 가수와는 달리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피땀어린 애정으로 꾸며진 인터넷 사이버세상(www.baeho.com/pe.kr등 4개)에서 생전보다 더욱 힘차게 숨쉬고 노래하는 배호를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독립투사 배국민씨의 아들이었던 그의 본명은 배신웅, 호적엔 배만금으로 기록돼 있다. <배호스테레오히트앨범 1집,아시아,1969년> 자켓과 음반사의 상업적 홍보로 알려졌던 '서라벌예대 졸업'.
그러나 부산 삼성중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라면? 악보조차 읽지 못했던 그가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허기진 배를 움켜지며 뼈를 깎는 인고의 노력을 음악 공부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른 최고의 인기가수라는 보상은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도 불러야 했던 노래는 처절한 절규이자 몸부림이었다. 천재가수 배호의 탄생과 죽음은 눈물겨운 휴먼드라마다.
1963년 작은 삼촌인 김광빈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가요계에 첫발을 디뎠다. 21세의 나이로 12인조 배호 악단을 결성, 국내 최초로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진풍경을 연출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 64년.
그해 영화주제가 등 3곡을 담은 데뷔음반 <황금의 눈,지구,LM120132>을 발표한다. 배호의 드럼연주 장면을 담은 자켓 사진은 이제 아주 귀한 볼거리가 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그의 음반은 독집 20여장을 포함해 대략 70여종.
그 이유는 병상에서 취입한 노래와 다소 회복한 뒤 재취입한 음반들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데뷔음반 발표후 신명난듯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러대던 배호. 일생의 음악 콤비인 배상태와의 음악 여정은 그가 1966년 신장염으로 쓰러진뒤 병상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3년전에 <돌아가는 삼각지>를 만들어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남진, 금호동, 남일해에게 노래를 주려 했던 배상태는 번번히 '이런 구닥다리 노래를 내가 왜 부르느냐'고 퇴짜를 맞아 자존심이 상했던 상태.
그래서 을지로 천지카바레에서 드럼을 치며 노래 부르던 병상의 무명가수 배호에게 악보를 건넨다. 거동조차 힘들던 배호는 병상 의자에 앉아 가래를 뱉어가며 취입을 강행했다. 한국대중가요의 불멸의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아시아,1967년2월>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주인을 만났다.
팬들의 첫 반응은 '병자의 노래, 깡패소리 같다'는 등 다분히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4개월후쯤부터 KBS 대구방송을 시작으로 장장 5개월동안이나 정상을 석권하는 진기록을 남긴다. 힘을 얻은 배호는 또다시 병상에서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발표, 확실한 인기보증수표가수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병마에서 회복한 3년간은 최대 황금기.
각 방송사의 가요상을 휩쓸었을 뿐만아니라 멀리 일본에도 팬들이 생겨났을 정도. 또한 당시 전체 연예인중 납세실적이 3위였을 정도로 부와 명예를 움켜쥔다.
그러나 이때의 왕성한 활동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결정적 이유. 무대에서 쓰러져 업혀오는 횟수가 늘어가고 참지 못할 고통의 순간에도 '무대에서 죽겠다'며 피를 토해댔다. 배상태 곡 <울고싶어> <마지막 잎새>는 생명을 건 마지막 취입이였다.
당대 최고의 여성가수 이미자는 1971년 5월7일 발매한 음반에서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직접 불러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배호에게 진한 애정을 보인다. 그해 11월7일 저녁 8시 미아리고개를 넘던 구급차안에서 짧은 생명의 불꽃은 꺼졌다.
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진 예총광장의 장례식 이후 장흥의 신세계공원묘지엔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헌화가 공원관리인을 괴롭힐 정도. 인천가요박물관 김점도 소장은 "서양에는 베토벤이 있고 동양에는 배호가 있다"고 극찬했다.
마니아들 사이엔 해묵은 배호 음반 진위 논란도 벌어진다. 지금도 가짜음반이 제작되는 것은 꺼지지 않는 인기의 반증이기도 하지만 사후에 탄생한 모창가수들 탓이다. 사후에 발매된 음반중 80%는 가짜음반이다. 이같은 상업적 작태에 유족들은 차리리 통곡을 한다.
"제발 더 이상 배호를 죽이지 말라고". 최근 30주년을 맞아 '배호거리' 탄생과 더불어 노래비 건립, 추모가요제 추진 움직임이 다시금 꿈틀거려 반갑기 그지없지만 걱정스러운 마음도 속일 수 없다.
집행부 이견으로 중단된 추모가요제의 악몽과 무산된 장충단공원 노래비 건립 때문. 팬들의 꺼질 줄 모르는 사랑으로 편안한 영면에 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전문가들도 어느 것이 진짜 배호 앨범인지 모른다 합니다.
배호보다 더 배호다운 창법을 구사하는 놀라운 분들이 많죠.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곡입니다.
(심금 (心琴) : 외부의 자극을 받아 움직이는 미묘한 마음)
저두 이제 나이살 먹은 축이지만 배호 세대는 아닌데 ~ ^^
(우린 이문세 세대일까 ... 우리 나이 또래한테 이문세만큼 판 많이 팔아먹은 가수는 없지 ~)
요새 어중간 유치찬란한 트롯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죠 ...
크 ~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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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살다간 천재가수
배호가 만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꼭 30년. 애수에 젖은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과 진한 호소력을 담은 그의 노래는 여성팬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의 노래들은 많은 남자들의 애창곡으로 지금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김대중 대통령도 그를 최고의 애창가수로 꼽는다. 잊혀진 많은 가수와는 달리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피땀어린 애정으로 꾸며진 인터넷 사이버세상(www.baeho.com/pe.kr등 4개)에서 생전보다 더욱 힘차게 숨쉬고 노래하는 배호를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독립투사 배국민씨의 아들이었던 그의 본명은 배신웅, 호적엔 배만금으로 기록돼 있다. <배호스테레오히트앨범 1집,아시아,1969년> 자켓과 음반사의 상업적 홍보로 알려졌던 '서라벌예대 졸업'.
그러나 부산 삼성중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라면? 악보조차 읽지 못했던 그가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허기진 배를 움켜지며 뼈를 깎는 인고의 노력을 음악 공부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른 최고의 인기가수라는 보상은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도 불러야 했던 노래는 처절한 절규이자 몸부림이었다. 천재가수 배호의 탄생과 죽음은 눈물겨운 휴먼드라마다.
1963년 작은 삼촌인 김광빈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가요계에 첫발을 디뎠다. 21세의 나이로 12인조 배호 악단을 결성, 국내 최초로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진풍경을 연출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 64년.
그해 영화주제가 등 3곡을 담은 데뷔음반 <황금의 눈,지구,LM120132>을 발표한다. 배호의 드럼연주 장면을 담은 자켓 사진은 이제 아주 귀한 볼거리가 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그의 음반은 독집 20여장을 포함해 대략 70여종.
그 이유는 병상에서 취입한 노래와 다소 회복한 뒤 재취입한 음반들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데뷔음반 발표후 신명난듯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러대던 배호. 일생의 음악 콤비인 배상태와의 음악 여정은 그가 1966년 신장염으로 쓰러진뒤 병상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3년전에 <돌아가는 삼각지>를 만들어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남진, 금호동, 남일해에게 노래를 주려 했던 배상태는 번번히 '이런 구닥다리 노래를 내가 왜 부르느냐'고 퇴짜를 맞아 자존심이 상했던 상태.
그래서 을지로 천지카바레에서 드럼을 치며 노래 부르던 병상의 무명가수 배호에게 악보를 건넨다. 거동조차 힘들던 배호는 병상 의자에 앉아 가래를 뱉어가며 취입을 강행했다. 한국대중가요의 불멸의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아시아,1967년2월>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주인을 만났다.
팬들의 첫 반응은 '병자의 노래, 깡패소리 같다'는 등 다분히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4개월후쯤부터 KBS 대구방송을 시작으로 장장 5개월동안이나 정상을 석권하는 진기록을 남긴다. 힘을 얻은 배호는 또다시 병상에서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발표, 확실한 인기보증수표가수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병마에서 회복한 3년간은 최대 황금기.
각 방송사의 가요상을 휩쓸었을 뿐만아니라 멀리 일본에도 팬들이 생겨났을 정도. 또한 당시 전체 연예인중 납세실적이 3위였을 정도로 부와 명예를 움켜쥔다.
그러나 이때의 왕성한 활동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결정적 이유. 무대에서 쓰러져 업혀오는 횟수가 늘어가고 참지 못할 고통의 순간에도 '무대에서 죽겠다'며 피를 토해댔다. 배상태 곡 <울고싶어> <마지막 잎새>는 생명을 건 마지막 취입이였다.
당대 최고의 여성가수 이미자는 1971년 5월7일 발매한 음반에서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직접 불러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배호에게 진한 애정을 보인다. 그해 11월7일 저녁 8시 미아리고개를 넘던 구급차안에서 짧은 생명의 불꽃은 꺼졌다.
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진 예총광장의 장례식 이후 장흥의 신세계공원묘지엔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헌화가 공원관리인을 괴롭힐 정도. 인천가요박물관 김점도 소장은 "서양에는 베토벤이 있고 동양에는 배호가 있다"고 극찬했다.
마니아들 사이엔 해묵은 배호 음반 진위 논란도 벌어진다. 지금도 가짜음반이 제작되는 것은 꺼지지 않는 인기의 반증이기도 하지만 사후에 탄생한 모창가수들 탓이다. 사후에 발매된 음반중 80%는 가짜음반이다. 이같은 상업적 작태에 유족들은 차리리 통곡을 한다.
"제발 더 이상 배호를 죽이지 말라고". 최근 30주년을 맞아 '배호거리' 탄생과 더불어 노래비 건립, 추모가요제 추진 움직임이 다시금 꿈틀거려 반갑기 그지없지만 걱정스러운 마음도 속일 수 없다.
집행부 이견으로 중단된 추모가요제의 악몽과 무산된 장충단공원 노래비 건립 때문. 팬들의 꺼질 줄 모르는 사랑으로 편안한 영면에 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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